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디 아민 (문단 편집) ==== 잔혹한 학정 ==== || [[파일:external/www.primeugandasafaris.com/uganda-safaris1.jpg]] || || 캄팔라의 강제 수용소 내부[* 저 붉은 것들은 전부 '''피'''인데, 심지어 이조차 아민이 '''쫓겨난 후에 찍은 사진'''이다! [[https://www.ugandabudgetsafaris.com/wp-content/uploads/2019/10/Idi-Amin-Torture-Chamber.jpg|2019년 사진. 과거에 비해 피가 완전히 닦여나간 수준인데도 피의 흔적이 보인다.]]] || >'''그(아민)에게는 도덕적 기준이나 정치적 기준도 없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자신만의 '규칙'을 기록한다. 그리고 그가 움직일 때면 그 기준이나 규칙도 바뀐다.''' >---- >에드워드 루구마요 (Edward Rugumayo, 1934~)[* 우간다의 정치인, 외교관, 교수, 환경운동가. 아민 시기인 1971년부터 1973년까지는 교육부 장관을, [[요웨리 무세베니]] 시기인 1999년부터 2000년까지는 우간다의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군대를 제외하고 우간다에는 아무도 더 이상 살지 않는다. 그들은 살아남을 뿐이다.(No one in Uganda, except for the army, lives any more. They only survive.)''' >---- >마케레레 대학교의 한 익명의 교수.[* 그 교수는 서구권 언론과의 인터뷰에 응한 다른 우간다의 난민들처럼 우간다에 있는 그의 가족이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지 말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politics/1977/03/05/ugandan-refugees-say-thousands-named-on-death-lists/dbcfd9b6-46b9-4d68-809d-bc14701b935e/|#]] ''''검은 히틀러''''라는 별명까지 붙을 정도로 이디 아민이 집권 중에 저지른 엽기적이고 추악한 행각은 역사상 그 누구와도 비교하기 힘들다. 쿠데타 며칠 후부터 우간다의 지식인, 장교, [[법관]]들이 마구 사라지기 시작했다.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대상은 주로 오보테를 지지했던 세력들이었는데, 약 3,000여 명의 정치인과 군인들이 살해 당했으며 특히 쿠데타 1년 만에 이전까지 있던 우간다의 군인들 중 단 1/3만 살아남았다. 오보테를 지지하던 마을들은 폐허가 되었으며 주민들은 학살 당했다. 1971년 4월 우간다 북부에서 [[수단]]으로 건너가려던 민간인 600명이 우간다 군대에 의해 학살 당했고, 오보테 시절의 육군참모총장 후세인 슐레이만과 우간다 최고의 명문대이던 마케레레 대학교의 부총장, 영국 [[성공회]] 대주교, 심지어 아민의 학살을 취재하던 [[미국인]] 2명도 살해되었으며, 당시 내각 장관 19명 중 7명이 살해 당했다. 이렇게 쿠데타 3개월 만에 무려 1만 명, 1년 반 만에 15만 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오보테를 지지하던 부족들이던 아콜리(Acholi)족과 오보테가 속한 소수 민족이던 랑고(Lango)족이었다. 아민은 우간다 북부에 살던 아콜리족과 랑고족이 모든 타 종족 출신의 군인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군대 권력을 이들이 독점하려 했다고 발표하며 이 부족들을 모함했다. 심지어 1977년 3월 5일자 [[워싱턴 포스트]] 지의 기사에 따르면 아민은 우간다에서 모든 아콜리족과 랑고족을 제거할 '[[제노사이드|마스터 플랜]]'을 짜기도 했다고 하며, 한 군인의 증언에 따르면 아민의 부하들은 잡으려고 한 랑고족 남성이 살기 위해 도망친 것에 분노한 나머지 [[크메르 루주]]마냥 아내가 집에 있었음에도 애꿎은 그들의 아기의 발을 잡고 나무에 내리쳐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 게다가 아민 정권은 [[방회(삼국지)|'성씨가 알파벳 'O'로 시작하는 사람들은 오보테의 지지자일 것이다']]라는 황당한 기준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으며, 군인들은 하도 여자들을 성적으로 학대한 나머지 '''아민 본인이''' 때때로 군인들에게 "여자들을 [[성추행|추행]]하지 말라"는 경고를 할 정도였다. 또한 당시 우간다에서는 조작된 증거 때문에 총살형이 처해진 사람들도 많았는데, 당시 우간다에서는 여자친구의 집에 산탄총과 권총을 보관했다는 이유로 게릴라 활동에 참여했다는 누명을 쓰고 공개처형된 학생까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아민은 [[1975년]] 11월 23일에 4,000명의 장애인과 거리의 거지들을 위해 진자에서 일자리, 무료 숙박 및 무료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라디오]]로 선언하고는 바로 다음 날에 손수 명령을 내려 이들을 군용 트럭에 실어 진자로 보낸 후 모조리 나일 강에 던져 악어 밥으로 주기도 했다.[* 이 학살의 동기도 어처구니없는 게 겨우 이 라디오 선언 3일 전에 완데라 막시니(Wandera Maksini)라는 이름의 목발을 짚은 장애인이 자신의 면전에서 "우리는 상점에 상품이 없는데 당신은 당신 스스로를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개자식아! 원한다면 날 죽여줘!"라고 말한 것에 기분이 상해서였다고 한다. 참고로 막시니는 이 라디오 선언이 있던 날에 군용 트럭에 실려가 '실종'되었다.] [[https://newz.ug/shocking-how-amin-got-rid-of-all-the-disabled-people-in-kampala/|#]] 심지어 우간다의 초대 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던 베네딕토 키와누카(Benedicto Kiwanuka, 1922~1972)의 최후는 매우 참혹하다 못해 엽기적인 수준이었다. 당시 '''현직''' 대법원장이었던 키와누카는 '완전한 체포 권한이 없는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지적하며 캄팔라 호텔에서 전화번호부를 훔친 혐의로 군 교도소에 수감되었던 영국인 사업가 도널드 스튜어트(Donald Stewart)[* 체포 전에 아민을 비판하는 내용의 편지를 쓴 적이 있었다.]를 석방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불복한 아민의 지시에 따라 1972년 9월 21일 오후 3시경에 '''고등법원의 회기를 주재하던 중''' 군인들에 의해 총을 맞은 후 신발 한 켤레가 벗겨질 정도로 무자비하게 거리로 끌려가 군용 차량에 실려 캄팔라 교외의 마킨디예(Makindye)에 있는 군용 교도소에 끌려간 후 바로 다음날에 군용 교도소에서 살해되고 시체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게 훼손되었다. 그리고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우간다의 내무부 장관을 역임한 오보테의 최측근 바질 키이자 바타링가야(Basil Kiiza Bataringaya, 1927~1972)는 쿠데타 직후에 투옥된 후 고문을 당하고 1972년 9월 18일 군용 지프에 태워진 채 음바라라(Mbarara) 외곽으로 끌려간 후 산 채로 사지가 절단되고 그 머리는 [[효수]]되어 군인들이 머리가 꽂힌 들고 음바라라 외곽 주변을 행진한 후 음바라라 막사에 공개적으로 전시되었다. 그의 처형 직후 그의 측근들도 최소 11명이나 처형되었고, 아내마저 1977년 처형되고는 시신이 불태워진 채 남편 가족이 소유했던 음바라라의 땅에 버려졌고 재산이 몰수당했다.[* 다행히도 바타링가야 부부의 8명의 자식들은 처형당하지는 않았고, 가톨릭 수녀원에 보내져 무사히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렇게 아민은 아프리카의 잔인한 폭군으로 이름을 날리며 국제 사회의 비난의 표적이 되었다. 아민이 권좌에 있던 8년 동안 무려 '''30~50만 명'''에 이르는 우간다 국민들이 희생 당했다고 인권단체는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우간다인 2~4%에 달하는 엄청난 수치였다. 희생자 대부분은 비[[이슬람교]]도이거나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 마케레레 대학교는 말 그대로 텅 빈 상태까지 가게 되었다. 실제로 아민이 축출될 무렵에는 거의 모든 우간다 국민들이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고 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민은 수도인 [[캄팔라]] 교외에 있는 부간다 왕국의 루비리(Lubiri) 궁궐 터[* 궁궐은 1966년 오보테가 무테사 2세와의 정치적 분쟁이 있었을 때 이디 아민이 오보테의 명령에 따라 파괴했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은 후에 복원한 것으로 보인다.]의 지하에 강제 수용소를 지었는데,[* [[구글 지도]]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https://www.google.com/maps/place/Lubiri+Nabagereka+Primary+School/@0.2998795,32.5650334,522m/data=!3m1!1e3!4m14!1m7!3m6!1s0x177dbc937657f1c1:0x9e470fd9206b7f38!2z7Lm067CU7Lm07IqkIO2MsOumrOyKpA!8m2!3d0.3018945!4d32.5664803!16s%2Fg%2F1tf3l8vq!3m5!1s0x177dbcec9ff42195:0x153cde9449c988c4!8m2!3d0.2990559!4d32.5655538!16s%2Fg%2F1hhwsxw6s?entry=ttu|#]] 심지어 근처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는데, 불행 중 다행히도(?) 1966년에 무테사 2세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무너졌기에 1998년에 재건되어 초등학생들이 고문 장소 바로 옆에서 교육을 받을 일은 없었다. [[https://schoolnetuganda.com/lower/lubiri-nabagereka-primary-school/|#]]] 위의 사진 속의 감옥이 바로 이 수용소다. 거기에 수감자들은 다음과 같은 꼴을 당했는데, 증언들을 조합하면 이 강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뚜올쓸라엥]],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북한|정치범수용소]]마저 능가하고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와 비교해도 손색이 전혀 없는, 한마디로 지옥보다 더 끔찍한 곳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매우 끔찍한 묘사들이 많으니 읽을 때에 주의를 요한다. {{{#!folding [ 열람하기 · 접기 ] 이 수용소의 복도는 전류가 흐르는 물 웅덩이로 가득 차 있었고 감옥의 입구에도 전류가 흘렀기 때문에 탈옥을 시도했다가는 바로 감전사했다. 감옥에는 방마다 창문, 환기 장치 하나 없는 5개의 구역이 있었는데, 이러한 한 구역에만 100명 이상이 수감되었기 때문에 수감된 이들은 감방에서 굶어 죽거나 질식사했으며, 화장실도 없었기에 위생 상태도 형편없었다. 이 수용소에서는 10*12피트(3.05*3.66m) 정도의 감방에 34명이 갇혀 있었다. 즉 '''4평도 안되는 방 하나에 34명이 감금된 셈.''' 식량 공급도 형편없어 일주일에 식사가 단 2번만 주어져도 운이 좋다고 여겨졌으며 심지어 13일 동안 감방에서 물도 마시지 못한 채 굶어야 했던 수용자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들에게 드물게 주어진 식사도 매우 조악하여, 겨우 흙으로 덮인 회색의 빵 덩어리와 우유와 설탕이 전혀 첨가되지 않은 탁한 차 정도에 불과했다. 이 때문에 일부 수감자들은 문자 그대로 '''수감자들의 시체까지 먹어가면서''' 목숨을 유지해야 했다. 게다가 아민은 '''직접''' 정적들에게 가할 고문을 고안하기도 했을 정도로 잔혹한 인물이었으니 감금된 죄수들에 대한 대우가 좋을 리는 전무했고, 오히려 죄수들에게는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가혹행위]]가 자행되었다. 교도관들은 죄수들에게 빽빽이 못이 박힌 마루 위를 맨발로 걸어가게 하거나 날카로운 돌들을 맨몸으로 기어가게 한 후 밤이 되면 독방에 가두기도 했으며, 구타하면서 이와 동시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개구리]]처럼 뛰어다니도록 했고, 수감자들에게는 민감한 부위일수록 더욱 집중적으로 [[전기고문]]을 가했으며 죄수들에게 다른 죄수들의 머리를 도끼로 내리쳐 죽이게 하거나[* 실제로 아민 시기에는 두개골이 부서진 채 발견된 수감자들의 시신에 대한 보고가 많이 들어왔다고 한다.] 죄수들을 일렬로 세운 뒤 한 죄수를 묶어놓고 다른 죄수로 하여금 '이걸 하면 형 집행을 유예해주겠다'고 속이며 겁에 질린 그 죄수에게 다른 죄수의 머리를 큰 쇠망치로 때려 죽이게 하고는[* 원치 않게 살인자가 된 이들은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사람에게도 똑같은 조건을 걸며 이와 같은 행동을 반복하게 하고는 이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죄수에게도 총을 쏴 죽였다. 심지어 이 교도관들은 사람의 눈을 뽑거나 죄수의 신체 일부를 절단한 뒤 굶주린 죄수들에게 이 [[인육]]을 강제로 먹으라고 주기도 했으며, 신체가 절단된 수감자에게 자신의 살을 강제로 먹이기까지 했다. 심지어 남자의 경우에는 [[거세]]라는 죽음보다 끔찍한 형벌을 가하기도 했으며[* 참고로 아민이 직접 거세한 사람만 무려 8명에 달한다고 한다.], 여자들도 [[강간]]은 물론이고 가슴이 도려내지거나 지독한 [[성고문]]을 당하는 등 참혹한 꼴을 당했다. 거기에 이미 굶주린 상태에 있던 죄수들은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못한 채 [[술]]과 [[마약]]에 취한 간수들에게 무자비하게 대검으로 찔리거나 마른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 개머리판, 몽둥이, 쇠창살 등으로 구타 당했고, 머리가 [[타이어]]의 림에 끼워진 상태로 채찍질을 당하거나 쇠창살로 타이어를 반복적으로 가격당하는 고문을 당하기도 했으며, 심지어 이곳의 교도관들은 총상을 입은 사람들을 앞에 나온 물 웅덩이에 집어넣기까지 했다. 이렇게 이 곳에서 무려 '''2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게다가 1972년 3월에 장교들 36명을 감금하고 고문했던 '[[싱가포르]]'라는 이름을 붙인 감방은 얼마나 참혹한 고문이 이루어졌는지 피가 바닥에 1cm 두께로 고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아민은 기분에 따라 똑같은 죄라도 누구는 재판도 없이 무죄를 선고한 후 석방시키고, 누구는 지독한 고통 속에 [[총살]]시키거나 쇠망치로 때려 죽이게 하는 처벌을 내렸는데, 이들 외의 처형 방법도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아민의 정적들을 처형할 때에는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곤봉과 쇠지렛대로 머리를 가격해 죽이는 것조차 양호해 보일 정도로 온갖 참혹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는데, 팔다리를 절단하거나 총을 쏜 후 피를 흘리며 천천히 죽어가도록 내버려두거나 강제로 눕힌 뒤 차를 희생자의 가슴 위로 지나가게 해 치어 죽이기도 했고, 살아있는 사람을 한 줄로 정렬한 뒤 탱크로 뭉개거나 죽을 때까지 강제로 [[소금]]과 [[모래]]를 먹이기도 했으며, 칼과 총검으로 사람을 베고 팔다리를 자르거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기도 했다. 이를 넘어 죄수들이 가득 찬 감방에 [[다이너마이트]]를 투척하기도 한 데다가 심지어 죄수들을 영하의 냉장실에 가둬 얼어붙게 했다가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채워진 매우 깊고 어두운 구멍에 던져넣고는 그대로 [[저체온증]]으로 얼어죽게 내버려두거나 아예 그 물을 서서히 전기로 가열해 [[팽형|삶아 죽이기도]] 했다. 거기에 간수들은 수감자들이 잔혹하게 살해되는 모습을 다른 수감자들에게 지켜보게 했으며, 이렇게 처형된 정적들은 참수된 후 머리가 아민의 냉장고에 보관된 후 아민이 보면서 희희낙락했던 것으로 유명하고,[* 아민은 이를 위해 [[프랑스]]에서 [[단두대]]를 특별 주문하기도 했다.] 시체가 은행에서 [[조리돌림|공개적으로 전시]]되거나 비료로 처리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아민은 보좌관들과 같이 방독면을 쓴 채 감옥에 방문한 후 죄수들을 직접 곤봉으로 구타하거나 거구의 몸으로 희생자의 가슴팍 위에 뛰어올라 짓밟는 방식으로 죽이기도 했는데, 아민이 집권 기간 8년 동안 손수 죽인 죄수들은 무려 200여 명에 달했다고 전해지며, 아민이 자기 손으로 '''2천 명'''의 죄수들을 죽였다는 말도 있다. }}} 게다가 비밀경찰은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는 우간다의 '거의 모든 협곡과 관목 숲에' 시체들을 유기해 놓고는 뻔뻔하게도 사람을 보내 유족들을 위로하는 척을 한 뒤 가족들이 시신을 찾아달라는 목적으로 1978년 가치로 300~1000달러 정도의 거액을[* 참고로 이 당시 우간다의 1인당 GDP는 207달러(2023년 환율로는 약 918달러)도 되지 않았다.] 바치면 가족들을 데리고 숲과 [[폭포]] 인근에 훼손된 상태로 유기된 가족들의 시신을 발견하는 '시신 발견자' 행세를 하는 뻔뻔함까지 보여주었다. 거기에 수감자의 가족이 석방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면 그 가족이 대신 총살 당해야 했다. 그리고 아민은 정적들의 시체를 트럭에 실은 뒤 나일 강의 [[악어]]들에게 던져주는 것을 아주 좋아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아민의 집권 기간 동안 우간다의 악어들은 '''사냥을 자발적으로 할 필요가 없어서 동물학자들이 경악할 정도로 게을러지고 몸집도 비대해졌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이후에도 우간다에는 혼란이 계속되면서 악어들은 계속 게으름을 피울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악어가 먹고도 썩어 남아돌 정도로 시체가 많아서 상류에서 떠내려와 댐 수로를 막고 있는 시체 치우기가 [[우간다]] - [[케냐]] 지방의 주요 댐인 날루발레 댐 관리요원들의 주 업무였다고 한다. 수력 발전소에도 시신을 하루에 40~50구나 버려서 시신들이 발전기의 활동을 막은 나머지 수력 발전소에서 만드는 전기의 양이 감소하여 캄팔라 거리의 밤의 조명의 선명도로 아민의 기분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민의 정적들의 시체는 강에 버려지지 않으면 집단 무덤에 버려지거나 집과 자동차에 넣어진 채 불태워졌다. 그리고 아민은 문맹으로 정확히는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헨리 키엠바(Henry Kyemba, 1937?~)[* 아민 시기에 보건부 장관을 역임하다 영국으로 망명하여 아민에 대한 책을 쓴 적이 있다.]의 말에 따르면 "아민은 정부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글을 쓸 수도 없었고 읽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그와 함께 일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때문에 입법권을 가졌던 아민은 구두로 발표한 법률을 라디오로 전국에 내보내는 식으로 나라를 통치했다. 부하들에게 명령과 정책을 전달할 때 전화, 라디오, 연설 등으로 전달했는데, 이때 정부 관리들이 아민을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하거나 화나게 했으면 즉시 체포되어 투옥되거나 즉결 처형되었다고 한다. 거기다 아민은 본인의 무식함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반지성주의|교육, 교육을 받아온 지식인, 교육 기관을 증오]]했기 때문에 학력과 경험이 풍부한 관료들을 모욕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게다가 아민의 [[이혼]]한 아내들 중 하나였던 케이 아도라(Kay Adroa, ?~1974)는 1974년 3월 26일에 이혼할 당시 주치의이던 피터 음발루 무카사(Peter Mbalu Mukasa)와 내연 관계를 맺어 무카사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케이는 아민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1974년 8월 13일에 아민 몰래 [[낙태]]를 하다가 심한 출혈로 사망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민은 불 같이 화를 내며 의사에게 명령해 '''케이의 시체의 얼굴과 팔다리를 절단해 얼굴을 거꾸로 붙이고는 팔다리도 위치를 서로 바꾸어 붙인 뒤 남은 이혼한 아내들 2명과 그들의 아이들에게 보여주었다.'''[* 다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증언도 존재한다. 마케레레 대학교의 연구원이던 프레드릭 구웨데코(Fredrick Guweddeko)는 이 일이 수술 중에 사망한 케이를 보고 당황한 무카사가 '전형적인 아민 작품처럼' 보이게 만들어 시체를 처리하려 한 것이라고 보았다. [[https://web.archive.org/web/20070528211152/http://www.monitor.co.ug/specialincludes/ugprsd/amin/articles/amin9.php|참고자료]]] 아민은 자신의 친척들에게도 이런 악행을 행했으며, 자신의 숙모가 식탁 위에서 이런 상태가 되어있는 참상을 목격한 아민의 가까운 친척은 공포를 느끼고는 그 날로 우간다를 탈출했다. [[http://kay-amin.blogspot.com/|케이 아도라의 의문사에 대해 정리한 글]] 1976년 8월 3일에 마케레레 대학교의 학생들은 아민의 장남인 타반이 이 대학교의 공과대학에 등록한 뒤 거만한 행동을 보인 것에 항의하는 진정서를 대학 당국에 제출했다. 그러자 바로 이 날에 군인들이 마케레레 대학교를 습격해 무자비한 진압에 들어갔다. 당시 대학교를 습격한 군인들은 정문 앞 광장에 있던 학생들에게 기관총을 난사하거나 학생들을 1~2시간 동안 맨무릎으로 기어다니게 하는 등의 기합을 가하고 교정에 드러눕힌 뒤 무자비하게 구타했다고 한다. 심지어 그 다음날인 8월 4일까지도 타반이 인솔하는 군인들이 학교에 습격하며 살육극이 계속 이어졌다고 하며, 물론 군인들에게 끌려간 후 구금된 학생들에게도 [[폭행]]과 [[강간]] 등의 가혹행위는 지속되었다. 이 이틀 동안 언론에서는 총 100명 이상이 죽고 1천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500~700여명이 연행되어 구금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고 보도되었으나, 앰네스티는 공개적인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사실로 인정하면서도 언론이 보도한 수치는 상당히 와전된 것이며 실제로는 10명 미만이 죽고 200명 정도가 연행되어 구금되었으며 연행된 사람들 중 20명 정도가 행방불명되었다고 보고했다. 참고로 이는 전술한 것처럼 이디 아민 시기 우간다에 있던 '''유일한''' 반정부 시위였다. 또한 이디 아민의 집권은 우간다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간다의 동물들에게도 끔찍한 참사였다. 이 시기에는 아민의 비호 하에 밀렵꾼과 군대들이 국립공원과 사냥터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밀렵과 벌목을 해댔기 때문에, 이 시기에 우간다의 [[코끼리]]들은 75%, [[악어]]와 [[사자]], [[표범]]들은 80%가 죽었고, 심지어 우간다의 [[코뿔소]]들은 무려 '''98%'''가 죽었다고 한다. 당연하겠지만, 이런 악행들 때문에 집권 중반인 1975년 3월에는 미국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1위'''에 올랐다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5031700209203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5-03-17&officeId=00020&pageNo=3&printNo=16448&publishType=00020|참고자료]] 1977년에 아프리카 국가들이 아민에게 인권 침해에 대한 책임을 묻는 유엔 결의안을 저지했는에도 아민은 1978년 1월에 있던 집권 7주년 기념식에서 "올해는 '평화와 화해'의 해가 될 것이다. 우간다에는 인권 침해가 없으며 그러한 주장은 망명자들에 의한 거짓 선전에 불과하다."라는 취지의 말을 남겼다. 물론 이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도리어 국제 앰네스티의 평가처럼 아민의 학정은 변치 않고 지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